- 합천에서 필름 카메라인 척 하는 디지털 토이 카메라로 찍은 벼 사진. 다음 레터에서는 생일 선물로 받은 이 카메라를 자랑하겠어요.
from 양
연휴 전에 받은 여러 레터들에서 각자 연휴에 무엇을 읽을 것인지 잔뜩 신나서 말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저⋯ 부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연휴 동안 책을 거의 읽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연휴가 오기 2주 전엔 저도 기대에 차서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글을 쓸지 머릿속으로 목록을 나열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전, 막상 손으로 3, 4, 5, 6, 7, 8, 9 날짜와 금, 토, 일, 월, 화, 수, 목 요일을 죽 쓰고 그 아래에 가야하는 곳을 쓰고보니 ‘집’이라고 쓴 날은 0일이었습니다. 하루도 없었죠. 제가 맡고 있는 여러 정체성들로서의 의무를 하려다보니 저에게 남는 여가 시간은 없는, 조금 가련한 연휴가 될 참이었습니다. 머릿 속으로 떠올렸던 책들이 먼지가 되어 날아가는 풍경을 떠올리며 얕은 좌절을 느꼈지요. 그리고 당연하게도 계획대로, 책 근처에는 가지 못하는 연휴를 보냈습니다. 이번 레터에서는 별 수 없이 연휴에 읽을 책도 아니고 읽은 책도 아닌, 읽고 싶었던 책들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날아간 리스트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네요.
1. 『우정』 모리스 블랑쇼 | 그린비
뭐읽사를 시작하면서 왠지 읽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 책인데 얼마 전에 갑자기 돈을 쓰고 싶어서 충동구매했습니다. 바타유, 뒤라스, 카뮈 등 블랑쇼가 우정의 감정을 느끼는 동시대 작가들의 글을 소환해서 비평을 통해 연대하는 책인데요. 지난 9월엔 문학과지성사에서 『강의 | 롤랑 바르트의 죽음들』이 나왔죠. 데리다가 쓴 ‘롤랑 바르트의 죽음들’도 글을 통한 대화, 글로 하는 애도와 우정이니 통하는 지점이 있고, 그래서 같이 읽고 싶었어요.
2. 『메모의 순간』 김지원 | 오월의봄
이제는 없어진 뉴스레터 ‘인스피아’의 발행인 김지원의 신작입니다. 편집자로부터 ‘메모하고 싶은 열망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는 당분간 써야 할 글이 있고, 손이 달아 오르게 하기 위한 밑작업이 필요하므로 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책을 읽어야 해요.
3. 『'좌파'의 '우울’』 엔조 트라베르소 | 새물결
뭐읽사 팟캐스트 지난 편에서 제가 미궁의 대화 물꼬를 열었는데 닫진 못했어요. 모두가 혼란해했던 대화⋯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 책을 읽어야지 생각했습니다. 아, 그 미궁의 시작이 된 제 질문의 요지는 ‘더 많이 알수록 냉소적으로 세상에 침 뱉는 내모습이 꼴보기 싫다. 앎을 추구하면서도 회의주의로 발을 헛디디지 않을 방법이 있나?’였는데요. 각자가 생각한 냉소나 회의주의의 포인트가 조금 달랐던 것 같았고 그래서 자꾸만 어긋나는 대화 속에서 길을 잃음… 이 책은 연휴 전에 앞부분을 좀 읽었는데 재밌더라고요. 근데 또 저의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찾을 수 있을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계속 읽어보려고요.
4. 『아름다운 여름』 체사레 파베세 | 녹색광선
『파베세의 마지막 여름』 읽고나서 기다리던 신간 출간되어 바로 구매. 이 책도 앞부분을 조금 읽고 있는데 초반부는 기대했던 것보다(?) 활기차네요. 그리고 소녀 둘이 나오는데, 저는 아저씨가 묘사하는 소녀의 속마음을 보면 일단 조금 토가 나오기 때문에⋯ 시작하자마자 위기에 봉착했는데요. 기다렸던 책이니 그래도 참고 읽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연휴동안 책을 좀 읽으셨나요? 그렇다면 부럽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