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녹음을 한 다음날 녹음본을 들었습니다. 이게 뭐죠? 『파베세의 마지막 여름』의 좋음을 기분 좋게 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녹음을 들어보니 웬 힘없는 여자가 파베세의 멋없음에 대해서만 연신 읊조리고 있더라고요. 멤버들에게 다시 녹음을 하자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우울했지만 그건 불가합니다. 기회는 늘 한 번뿐입니다. 내가 대체 왜 그랬는지, 뇌 한 쪽이 자신을 위한 변명을 열심히 찾아 헤맵니다만 곧 다른 한 쪽이 쉿! 소리를 냅니다. 변명은 그만 하지 않겠니? 이미 일어난 일이란다. so it goes⋯.
제 앞엔 분명 좋은 것이 얼마나 좋은지 신명나게 퍼뜨릴 기회가 있었으나 그것을 허무하게 날리고 이 작은 지면을 쪼개어 『파베세의 마지막 여름』에 대해 얘기해봅니다⋯. 파베세에 대해 피에르 아드리앙이 쓴 문장에 동의합니다. “파베세는 상태가 전염될지 모르니 너무 자주 만나지 말아야 하는, 가차 없는 말들을 내뱉는 친구가 되었다.” 무기력과 허무는 쉽사리 전염되고 저는 이제 더 이상 그 시절의 저를 만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파베세의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은 자꾸만 입술의 양끝을 턱 아래로 늘어뜨리며 연신 으- 소리를 내게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파베세의 친구들의 그의 “악덕”에 대해서 짜증내고 화낸 것처럼. 그렇지만 파베세의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비관심, 그리고 어디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는 회의주의가 제 안에 이제 결코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엔 스스로 솔직하지 못한 것이겠지요. 저는 부정하고 싶은 동질감과 싫지만-끌림의 기묘한 기분으로 파베세를 따라다닌 것 같습니다. 피에르 아드리앙의 파베세에 대한 마음도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저보다는 조금 더 파베세를 가엾게 여긴 것 같긴 하지만.
제목이 『파베세의 마지막 여름』이고, 파베세는 여름의 작가이고, 여름에 자살한 작가이니 당연히 이 책은 여름의 책입니다. 저는 가을에 가을의 책을, 겨울에 겨울의 책을 찾아 읽진 않지만 여름엔 꼭 여름의 책을 찾아 읽게 됩니다. 아무래도 강렬한 계절이니까요. 여름의 책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이 책은 쨍한 풍경 속에서 귀퉁이가 약간씩 날라간 빛바랜 슬픔을 품은 여름 책입니다. 뭐랄까요, 누구도 그렇게까지 많이 슬퍼하진 않는 비극에 관한 이야기? 이탈리아의 선명한 여름 풍경 속에서 듣는 희미한 사람의 이야기⋯. 이렇게 쓰다 보니 아무래도 늦여름에 어울리는 책이었으려나? 뒤늦게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저는 시기적절하게 잘 읽었네요.
저는 이번에 유시 파리카의 『미디어의 지질학』을 소개하면서, 어려움에 직면한 아마추어 독자의 고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후 이 책의 ‘먼지와 소진된 삶’ 장에 등장하는 레자 네가레스타니의 『사이클로피디아』를 읽기 시작했는데요. 무척 흥미롭지만 물리적으로도 다소 무겁고 집중을 요하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변화하는 행성 지구를 위한 문학』을 들고 다닙니다. 휴일에는 홀린 듯이 다와다 요코의 『영혼 없는 작가』를 펼치기도 하지만, 어제는 이 모든 책에 손이 가질 않았고 안드레아스 말름의 『팔레스타인의 파괴는 지구의 파괴다』의 서문을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집어든 책들 사이에 어떤 흐름이 있는 것 같네요. 『미디어의 지질학』이 인간을 구성하는 미디어를 넘어 전 지구적 현상으로서의 미디어를 다룬다면, 『변화하는 행성 지구를 위한 문학』에서 마틴 푸크너는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생활 방식에 연루되어, 정착 생활을 규정하고 방어하는 데 일조한 문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세계문학은 자원 추출의 역사에 연루된 공모자이다!) 레자 네가레스타니는 『사이클로피디아』에서 석유 추출이라는 신앙과도 같은 광기에 대한 대단히 몰입되는 이야기를 지어냈고요. 유시 파리카가 왜 이 책을 인용했는지 알 것 같다고 해도 될까요? (잘 모르지만⋯.) 안드레아스 말름은 『팔레스타인의 파괴는 지구의 파괴다』의 서문에서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인용합니다. “식민자에게는 과시벽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안전을 우려하는 마음가짐으로 ‘자신이 이곳의 주인’임을 피식민자에게 큰 목소리로 일깨운다.” 채굴의 역사는 인류가 자연을 식민화하며 발생하는 문제 그 자체입니다. 이와 같은 파괴는 처음에는 문제였지만,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문제 없는 상태’가 되어 우리에게 익숙해집니다.
익숙해진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거리낌 없이 살기를 원합니다. 며칠 전 아침에는 키노코 테이코쿠(버섯제국)의 ‘고양이와 알레르기’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걸었고 가사는 잘 모르지만 어쩐지 흐리고 가라앉은 날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걷던 길에 작은 새의 시체를 보았고, 문득 제가 버섯 티셔츠를 입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 티셔츠에는 『세계 끝의 버섯』에서 발췌한 문장이 프린트되어 있고요.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산책을 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버섯을 발견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을까? 아니면 이렇게 손쉽게 자의적으로 해석되곤 하는 걸까. 레터의 원고에 대해 궁리하다가, 녹음에서 연루됨과 공모의 문제를 빼먹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실이 손에 잡히지 않고, 그래서 번갈아 가며 손에 쥔 책을 바꿉니다. 그리고 이 책들을 고르는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금강산에 가보신 적이 있나요? 물론 저는 없습니다. 1998년부터 2008년 여름까지는 금강산 관광을 했었단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 (그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조금 슬프기도 합니다. 제가 금강산 이야길 하는 이유는 이번 팟캐스트에서 박완서 작가의 『미망』을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미망』은 1990년에 출간된 대하소설로 2000년대엔 『꿈엔들 잊힐리야』 라는 제목으로 유통되었으나 최근 민음사에서 『미망』으로 다시 출간된 도서입니다.
박완서 작가의 고향은 익히 알려진 대로 개성, 박적골입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조선 말 개성 지방의 거상(제가 팟캐스트에선 양반가라고 소개하였는데, 박완서 작가의 실제 가정과 혼동하였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의 손녀로 태어난 태임이와 아래로 이어지는 3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한국전쟁 발발까지 이어지는 내용은 『백년 동안의 고독』과 비견해도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광복 80주년인 올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읽은 『미망』은 거대한 흐름 앞에 나약한 인간 군상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그런 혼돈 속에서도 무엇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우화 같기도 했습니다. 겪어보지 못한 역사를 대신 경험해 본다는 것도 좋은 일이었고요. 또 제가 실제론 들어본 적도 없는 개성 사투리를 따라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지금 개성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그런 생각을 교류할 기회가 올까요? (BGM ♬ 서태지와 아이들 - 발해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