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갑자기 책을 정리했습니다. 해야지, 해야지 마음만 먹은 지 어느새 반년⋯ 벼락처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당장 실행했습니다. 버릴 책, 중고서점에 팔 책을 구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때 산 열린책들 도스토옙스키 시리즈는 버렸습니다. 양장 스페셜을 구매했기 때문이죠. 대학교 때 쓰던 교재도 버렸습니다. 이걸 왜 여태껏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욕심에 산 수많은 책은 중고서점 행입니다. 래핑을 뜯지 않은 책들도 많더군요. 어떤 마음으로 샀는지 하나하나 다 생각이 났지만, 그때의 마음이 이제는 또 달라져서 오히려 쉽게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리하지 못한 책도 많습니다. 페미니즘 서적들은 이제 더 이상 구하지 못하는 게 많아 고이 모셔두기로 했습니다. 앨리 스미스의 계절 시리즈, 하라 료의 사와자키 탐정 시리즈도 한동안은 서가를 계속 지킬 것 같습니다. 커뮤니케이션북스의 컴북스 이론 총서도 더 좋은 곳으로 옮겨둡니다. 요즘의 관심사인 후성유전학과 정신건강 책들도 서가 한켠에 뿌리를 박았습니다.
이번 정리는 이전 정리와는 다른 느낌을 줍니다. 절대 버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처리하고 읽을 거라고 낙관하던 책들도 조금은 가볍게 보내주었습니다. 결자해지. 책은 읽는 것으로도 한 뼘 성장할 수 있지만 정리를 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나아감을 선사해 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분간 진짜! 책 그만 사겠습니다.
이끼님이 책을 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깝다!”였습니다. 좋은 책이 분명 많았을 것이다⋯. 줍고 싶다⋯. 책 하이에나로 산 지 n년 차, 사람들이 책을 버리는 곳마다 가서 줍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합니다. 사실 그리 적극적으로 싸우지는 않습니다. 주로 덥석 굴복하는 편이지요. 얼마 전에도 친구에게 한 구루마가 넘는 책을 얻었습니다. 솔 출판사의 카프카 전집, 도서출판 길의 벤야민 선집, 민음사의 쿤데라 전집, 을유문화사 암실문고의 몇몇 권… 받은 책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가슴이 뛰었습니다. 아마 읽진 않을 것 같지만⋯.
제 서가에 이미 있는 책들을 쭉쭉 읽어 나가도 아마 이번 생 안에 다 읽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소설이나 교양서 같은 건 가능하겠지만 거대한 벽처럼 줄지어 서 있는 철학 원전들은 언젠가 펴보기나 할까요? 대체 그 책들을 저는 왜 못 버리고 있을까요? 그 이유의 8할은 아마 저의(혹은 모든 책 호더의) 징크스 때문일 겁니다. 책을 버리면 일주일 이내에 꼭 그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일이 생깁니다. 읽지 않은 책의 경우 누군가가 추천을 한다든지, 읽은 책의 경우 글을 쓰다가 갑자기 그 책 안의 어떤 디테일이 꼭 필요해진다든지 하는 일입니다. 한두 번 반복된 일이 아닙니다. 한두 번으로는 감히 ‘징크스’라는 표현을 쓰지도 않습니다. 그건 인생에서 매번 반복되어 온 일입니다.
그래서 책을 버릴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준비가 되었나?’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솎고 솎고 솎아서 최후의 YES를 받아낸 책들만을 버립니다. 고작 책 버리는 데에 쓰기엔 조금 과하도록 결연하고 비장한 마음으로요. 그러나 다음 날, 혹은 다다음 날이 되면 어김없이, 난데없이 제가 신뢰하는 누군가가 잔뜩 흥분해서는 제가 버린 책을, 아직까지도 쓰레기통에 처박을 때 손에 든 무게감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바로 그 책을 추천합니다. 도무지 안 읽을 수 없는 격정적 추천사로요. 미칠 노릇입니다. 이러니 어찌 책을 버리겠습니까. 예⋯. 모든 호더에게는 변명이 있는 법이지요⋯.
《뭐읽사》 4화에서는 올해 읽은 책 중 좋았던 세 권을 골라 얘기해봤습니다. 그런데요? 얘기 다 하고 나니 또 순위에 넣지 못한 다른 책이 생각나고⋯. 과연 그 세 권을 고른 것이 옳았나 싶고⋯. 세상에 좋은 책이 너무 많은 탓입니다.
악몽을 꾸다 깨어났습니다. 『보도블럭 아래 해변』은 68년 5월을 촉발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SI)의 결성과 해체까지 주요한 인물과 개념에 대한 해석과 주변부 인물들의 시도까지를 다룬 책인데요. 새로운 세기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비슷한 문제에 봉착해 있는 우리는 자격 없이도 이 창고의 실패한 시도들을 꺼내 전용하고 써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웹진 마테리알도 그런 시도 속에서 이렇게 책을 낸 것 같고요. 시도하는 사람의 ‘자격 없음’이야말로 중요한 것 같고⋯. 이런 식으로 간결하게 설명했으면 제 앞에 앉은 두 분의 표정이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결산이라는 주제로 한 이번 녹음에서 저는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해댔던 것일까요? 반성합니다⋯. 반성문을 쓰고 싶은 심정⋯.
자격 없이도 가능한, 다양한 시도 속에서 우리는 어딘가로 갈 수 있다. 어쩌면 새로운 세기로⋯. 이 팟캐스트가 바로 그런 그 시도인 것 같기도 하다. 결산이 오늘의 주제인데, 바로 이 녹음이야말로 올해의 ‘결산’인 것 같다. 일상을 바꾸고자 했던 어떤 시도의 결과물⋯ 그래서 너무 좋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미래(녹음의 결과물을 듣게 될 분들)와 과거(두서없는 횡설수설 앞에서 서서히 질려가던 멤버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하고 싶네요.
책, 어떻게 버릴 것인가? 책을 버림과 버리지 못함 사이에서 저 자신을 버리고 싶네요. 할 수 있는 자가 버려라(인생). 진지하고 싶지 않고 농담처럼 산뜻하게⋯ 불완전해지고 싶습니다. 말이나 못하면⋯. 못하지만⋯.
언발란스한 연말 결산이 가미된 《뭐읽사》 4화는 곧(연내에) 업데이트 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